▲ 나경수 전자.정보인협회 부회장

이 복잡다단한 시대의 사람들은 어떤 모습일까? 세상을 등지고 어두운 뒤안길에서 고독하게 자기의 멍든 마음을 매만지고 있거나, 혹은 복잡한 큰 거리에 서서 어느 어두운 골목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핏기 없는 사람일수도 있겠지. 아마도 그런 사람들은 화려한 의상을 입었거나 호화찬란한 무대의 주인공도 분명 아닐 것이다. 아직도 그런 사람은 인생의 호화로움 속에서 서성거리지도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어떤 긍지나 자부심을 가지고 현실의 패배를 인정하지도 거부하지도 못하고 있을 것이다. 허정한 세월 속에서 몽롱한 정신으로 눈물을 흘리겠지. Requescat in pace !

우리 인간의 의사에 아무 관계없이 이미 정해진 운명이 운수(運數: fortune)다. 사람의 힘을 초월한 천운과 기수를 지칭한다. 인간의 운명은 천명(天命)에 의해 지배된다고 생각하고 고대로부터 장래를 예지하는 갖가지 점성술이 형성되어 발전하여 왔다. 중국에서는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바탕으로 하여 운수를 점쳤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래로부터 택일, 방위, 관상, 수상, 족상, 작명 등으로 운수를 판단하는 관행이 널리 성행되어 왔다.

운명(運命)이란 인간을 둘러싼 우주 만물을 지배한다고 믿어지는 초인간적인 힘을 말한다. 즉 사람에게 닥쳐오는 모든 화복과 길흉, 사람의 행동을 지배하는 큰 힘(destiny)을 지칭한다. 인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도 없으며, 정해진 운명에 따라 모든 사상(事象)이 필연적으로 일어난다는 사고방식을 운명론(fatalism) 혹은 숙명론이라고 한다. 그 좋은 예로 중국의 천명설(天命設), 인도의 숙업설(宿業說), 기독교의 섭리와 예정설(豫定設) 등이 있다. 그리고 개인의 뜻과 그 환경 및 운명과의 뒤엉클어짐을 주제로 하여 비극으로 끝내려는 극문한(劇文學)을 우리는 운명극, 운명비극 또는 경우비극(境遇悲劇)이라 부른다.

미개사회에서는 사전에 아무리 주의하고 노력하더라도 예정된 날에 죽도록 운명을 타고 난 것으로 믿었다. 이런 경우에는, 인간이란 운명을 오직 감수할 뿐이다. 이것이 단순한 미개사회의 운명관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인은 운명을 알고 모이라(Moira) 여신의 의지에 스스로 복종함으로써 운명에서의 해방을 꾀했다. 적극적으로 운명을 내 몸에 받아들이는 운명애(運命愛)를 외친 독일의 철학자이며 시인인 니체(F.W. Nietzsche: 1844-1900)가 이 형이다.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 인간의 구원은 영원히 성취된다고 믿고 운명을 극복하고자 하는 그리스도교가 이 형이다.

1808년 베토벤이 작곡한 교향곡 제5번이 운명교향곡(運命交響曲)이라고 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다단조 작품 67, 전부 4악장으로 되어 있다. 작곡자가 <운명은 이와 같이 문을 두드린다>라고 말한 바 있는 유명한 동기가 전곡을 지배하고 있다. 힘찬 악상(樂想)과 완벽한 작곡 기술에 의한 획기적인 걸작으로서 유명하다.

사전에서는 운수를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천운(天運)과 기수(氣數)>로, 운명을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일체를 지배한다고 생각되는 필연적이고도 초인간적인 힘>으로 정의하고 있다. 운명은 정녕 우리가 사람의 힘으로는 바꿀 수가 없는 것일까? 그대로 따라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곳은 어디일까? 답답하다. 그리스도교의 중심교리가 천국(天國)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것이다.

이제

남은 사람들은,

회한도

초조도

분노도

정한마저도

다 털어버렸네.

웅대하다 대자연,

가파르다 운악산,

대자연아, 너무 슬퍼하지 마라!

운악산아, 너무 후회하지 마라!

우리는 아주 나약해

우리는 순종했노라.

그대 뜻이라면

그대 원이라면

우리는 언제나 경청하고

우리는 언제나 복종하리

이제는 모든 것이 훌쩍 떠나갔고

그대는 사랑하는 이를 품었으니.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