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정수 전력연구원 수화력발전연구소장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기 시작하면 엄마가 자녀에게 꼭 가르치는 것이 있다. 모르는 사람을 믿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어떤 부모는 실제 상황과 비슷하게 연출하면서까지 교육을 시킨다. 믿을 수 없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막 경험하기 시작한 아이에게 믿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것부터 가르치는 것이다.

한편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갖가지 신종 사기 유형이 있어서 함부로 전화를 받을 수도 없는 입장이다. 검찰이나 국세청을 사칭하기도 하고, 유괴범을 사칭하기도 한다. 전화 사기는 물론 이메일을 이용한 사기도 종종 발생한다. 어디 하나 긴장을 풀면 안되는 세상이 되었다.

더 나아가서는 이제 함부로 호의를 베풀 수도 없다. CCTV 카메라가 설치된 현금지급기나 슈퍼 마켓에서는 지갑을 보았더라도 주인을 찾아주면 안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절도범으로 몰리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해외여행 중에 출입국 심사대에서 노약자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어도 안 된다. 혹시 마약이나 밀수품의 운반책으로 몰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딱한 세상이 되었지만 어쩌면 세상의 이치인지 모르겠다.

혹자는 한전 사람들을 오해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신중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다. 전기는 한번 정전이 되면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성능이 검증된 제품만을  사용한다. 전력설비 시스템은 최대한 신뢰할 수 있는 상태로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전 사람들은 전력설비를 아주 신중하게 다루기 때문에 함부로 믿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이제 기술이 많이 발달했기 때문에 너무 신중한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믿지 못해서 미리 부품을 교체하면 설비는 신뢰도가 높아지지만 경제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과학적인 방법이 신뢰도를 평가하는 방법이고 이를 학문으로 체계화 한 것이 신뢰도 공학이다.

신뢰도공학이라는 학문이 있다. 사고가 나면 안 되는 우주항공 산업에서부터 시작해 원자력산업에서도 활발하게 적용이 되었고 자동차 부품에서도 중요한 학문으로 자리 잡았다.

신뢰성이란 ‘부품이나 시스템이 주어진 환경에서 고장 없이 일정기간 동안 원래의 성능을 유지하는 특성’을 말한다. 고장이 발생할지 여부도 실험을 하거나 통계적으로 처리해 알아낸다. 그 고장이 전체적으로 어떤 파급효과를 가져오는지를 분석하기도 한다. 파손모드영향분석(FMEA)이라는 과정을 통해 어떤 설비가 가장 위험한지를 구분해내는 것이다. 위험도가 높아 정말 중요한 설비 중에서도 고장 날 확률이 높은 부품만 집중적으로 관리하면 전체적으로 시스템은 안전하면서도 경제적으로 운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믿을만한 사람은 알아서 하도록 자율권을 주고 믿지 못할 사람은 집중적으로 관리해 사고를 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믿지 못할 사람에게 감시체계를 더욱 강화시키는 것으로 성폭력 전과자에게 전자감시발찌를 채워서 24시간 감시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모든 동네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간격으로 순찰을 하는 것이 아니고 범죄발생빈도가 높은 지역을 우려되는 시간에 집중적으로 감시하는 원리와 같다.

위험도가 높은 설비에 실시간 감시장치를 설치하기도 한다. 실시간으로 진동을 측정하고 압력과 온도를 계속적으로 감시하는 것이다. 위험한 골목과 사고가 많은 곳에 CCTV를 설치하는 것처럼 위험도가 높은 시스템에도 온라인 모니터링 장치를 개발해 설치한다. 높은 정밀도의 비파괴진단을 실시해 조금이라도 사고 칠 기미가 보이면 예방점검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위험도기반진단기법(Risk Based Inspection)이고 신뢰도중심기법(Reliability Centered Maintenance)이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개념은 같다.

전력연구원에서는 화력발전설비의 설비관리 전산시스템에 위험도기반진단기법을 세계최초로 적용해 성공적으로 운영 중에 있다. 물론 선진국에서 이미 개발해 적용한 이론과 경험을 우리나라의 IT기술과 접목한 것이다. 설비관리 전산시스템도 국내 업체가 보유한 토종시스템으로 국내 경영환경에 맞춤식으로 개발된 것이다.

이 시스템은 동서발전주식회사의 전체 발전소에 적용하는 아주 의욕에 찬 과제로서 현재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2008년도 말에는 자랑할 만한 시스템이 구축될 것이다. 전체 발전설비의 모든 운전 데이터는 실시간으로 현장의 운전 요원과 정비원들이 볼 수 있으며 원격으로 본사의 전문가들까지도 관리할 있도록 시스템을 갖추었다.

대형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어려운 점도 많았다. 세계 최초로 많은 시스템들을 한 시스템으로 엮는 것이 쉽지 않았고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그러나 이제는 한바탕 추억으로 남으면서 누구에게도 자랑할만한 시스템으로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