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다고 무시할까봐 올린 나이
“집에서 전화가 왔는데 아이가 아프다고 하네요. 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김 사장과 친구라고 했잖아. 그래서 내가 불렀고, 거의 다 왔다고 하던데….”

유통업체 대표인 A사장은 거래처 사장과 저녁식사를 하다가 아이 핑계를 대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사실 A사장의 말은 거짓이었다. 하지만 A사장으로서는 김 사장과 함께 자리를 하는 것이 껄끄러웠다. 그래서 거짓으로 핑계를 대고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A사장이 김 사장과 알게 된 것은 오래전의 일이었다. 동안인 A사장은 처음 사업을 시작하면서 너무 어리면 무시당할까봐 나이를 몇 살 올렸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나이가 한참 많을 줄 알았던 김 사장이 “갑장을 만나 반갑다”며 친구가 되자고 했다. 얼떨결에 친구가 된 두 사람은 한동안 사업파트너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A사장은 나이를 속인 게 부담스러웠다. 김 사장과 함께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본의 아니게 계속해서 나이를 속여야 했다. 학번도 속이고, 군대 갔다 온 시기도 속여야 했다. 그러다보니 동창생이나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A사장의 말 속에서는 선배는 친구가 되었고, 친구는 후배로 뒤바뀌었다. 웬만해서는 나이 이야기가 나오는 화제는 피해야 했다. 나이를 한번 속인 것이 끝없는 거짓말을 해야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어떤 사람은 “너무 젊어 보인다”면서 의심의 눈으로 보기도 했지만 김 사장이 “미남형은 어려 보인다”면서 A사장의 나이에 대한 ‘보증인’ 역할을 해서 별 무리 없이 넘어갔다.

■나이가 들통 나면 큰 낭패
광범위하게 알면 알수록 나이를 속인 것에 대한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중간에 원래 나이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려고 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요령껏 대처를 해도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A사장은 친구의 장례식장에 갔다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김 사장과 마주치게 된 것이다. 친구는 김 사장의 친척 동생이었다. A사장과 김 사장의 관계를 모르는 친구는 두 사람을 ‘소개’하는 실수(?)를 저질렀고, 그 순간 모든 것이 들통 나고 말았다.

며칠 후 A사장은 김 사장을 찾아가 그동안 ‘본의 아니게’ 나이를 속인 것에 대해 사죄를 했다. 하지만 김 사장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았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해 동안 자신이 속은 것에 대해 ‘적개심’마저 드러냈다. 그 후로도 A사장은 몇 번이고 사죄를 했지만 결국 김 사장은 닫힌 마음을 열지 않았다. 김 사장 말고도 A사장에게 ‘속아야 했던’ 다른 사람들까지도 합세했다. A사장은 후회를 했지만 이미 항아리는 깨져있었고 물은 다 쏟아진 상황이었다. 아주 작은 거짓말이 이렇게 큰 화가 될지 몰랐다.

장유유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국 사회에서 인간관계를 맺을 때 나이는 상당히 민감한 요소로 작용한다. ‘꿀리지 않기’ 위해 나이를 속였다가 인간관계가 좁아지거나, 나중에 나이가 밝혀져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다. 끝까지 속일 수 있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한 다리 건너면 알 수 있는 게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다. 나이를 속인 괘씸죄는 의외로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