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최 부잣집의 철학

부자가 존경받기 힘들다는 말이 있다. 아무 이유 없이 부자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도 있다.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착취’내지는 ‘불법 또는 편법’, ‘특혜’와 같은 부정적인 방법을 동원했다는 의혹을 받는 부자가 많기 때문이다.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은 부자와 비교된 초라한 자신의 모습에 대한 자괴감을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부자에 대한 막연한 반감, 즉 ‘나는 이렇게 어렵게 사는데 저 사람들은 왜 편하게 잘 사는갗 하는 질투의 마음일 수도 있다.

가진 자가 좋은 일을 하면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지만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도 있다. ‘무슨 꿍꿍이속이 있을 거야.’ 특히 남을 돕는데 적극적일수록, 물질적인 지원을 많이 할수록 ‘뭔가를 노리고 한다’는 의혹의 눈빛은 강해진다. 봉사활동을 생색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람도 많으니 그럴 수도 있다.

떳떳하지 못한 부자들도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부자들이 지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당한 경제활동에 의해 재산을 축적한 부자는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존경받는 부자는 그리 많지 않다.

부자이면서도 존경 받은 집안을 꼽으라면 경주 최 부잣집을 꼽을 수 있다. 조선시대 300년 동안 만석꾼이었던 최 부잣집에는 독특한 철학이 가풍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흉년에는 땅을 사지 않는다’는 것은 흉작으로 끼니를 채우기 힘든 농사꾼들이 연명할 곡식을 사기 위해 헐값에 내놓은 땅을 사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또한 ‘파장에는 물건을 사지 않는다’는 원칙도 있었다. 땅이나 물건이나 정당한 거래가 아니면 큰 이익이 나오더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원칙에는 못 사는 사람들의 재산을 착취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 누구든 자유롭게 쌀을 퍼가시오

최 부잣집의 또 다른 원칙은 ‘1만석 이상의 재산은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데 사용한다. 집을 찾아 머물다 가는 과객을 후하게 대접한다. 주변 100리 안에는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한다’는 것이 있는데 이는 요즘으로 말하자면 ‘나눔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인 것이다.

재산 형성과 나눔에서뿐만 아니라 최 부잣집 사람들의 겸손한 생활자세도 일반적인 부자들의 생활과는 비교가 되었다. ‘벼슬은 진사 이상 하지 않는다. 집안에 시집온 며느리는 3년 동안 무명옷만 입는다. 모든 사람이 힘든 보릿고개 때는 쌀밥을 금하고 은수저 사용도 않는다’ 등 가진 자가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마저도 시대의 흐름과 맞춰 포기하거나 축소하기도 했다.

경주 최 부잣집의 전통과 정신이 지금도 회자되는 것은 그들이 존경받을만한 부자라는 점 때문이다. 바로 이런 최 부잣집의 정신이 바로 이 시대 부자가 배워야 할 철학인 것이다.

또 다른 존경받는 부자로 조선 영조 때 전남 구례에 살았던 ‘류이주’라는 사람을 예로 들 수 있다. 그의 집이 99칸의 대저택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도와 재산이 얼마쯤이었는지는 짐작이 간다. 집 구조를 보면 사랑채와 안채의 중간에 곳간채가 있었다. 그리고 곳간채에 특이한 장치를 해놓은 쌀뒤주가 하나 놓여 있었다.

쌀이 약 2가마 반이나 들어가는 상당히 큰 뒤주의 하단부에는 어른 주먹이 하나 들어갈 만한 작은 구멍이 있었다. 그 구멍을 막고 있는 마개를 옆으로 돌리면 쌀이 나오게끔 되어 있었는데 마개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그 뜻은 ‘다른 사람도 마개를 열 수 있다’는 것이다. 의역을 하자면 ‘이 뒤주는 누구라도 마개를 열어 쌀을 마음대로 퍼갈 수 있는 뒤주’라는 것이다.

■ 貧者의 자존심 지켜주는 배려

류씨 집안에 있었던 그 뒤주의 용도는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베풀기 위한 것이었다. 곡식이 떨어진 가난한 사람들이 그 뒤주의 쌀을 가져다가 연명을 했고, 고을 사람 이외에도 류씨 저택에 신세를 진 과객들도 뒤주의 쌀을 조금씩 가져가곤 했다고 한다.

한 사람이 가져가는 쌀의 양은 보통 한두 되 정도였다고 한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았지만 많은 양을 가져간다거나 바닥까지 긁어 가져가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뒤에 와서 뒤주를 열어 쌀을 가져갈 사람을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허기를 달래기도 버거운 가난한 삶이지만 불문율과 염치가 살아 있는 사회였다.

주인 류씨의 철학이 돋보이는 것은 가난한 사람에게 곡식을 나눠주었다는 사실에 더해 받는 자를 세심하게 배려하는 마음이다. 류씨가 직접 쌀을 주거나 하인을 시켜 분배하지 않고 별도로 뒤주를 만들어 필요한 사람들이 알아서 가져가도록 한 것은 그들의 자존심을 배려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난해도 동냥을 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되고 주는 사람을 대면하지 않고 뒤주에서 쌀을 가져갈 수 있다면 심적으로 부담이 덜 된다. 비록 가난에 찌들어 곡식을 얻어야하는 처지에 빠졌더라도 그들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게 배려한 류씨의 아름다운 마음씨는 더큰 감동을 넘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류씨의 저택에 남아 있는 타인에 대한 배려는 아주 낮게 설치된 굴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굴뚝은 높을수록 연기가 잘 빠지지만 류씨 저택의 굴뚝은 어린아이 키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밥하는 연기가 높이 올라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가난한 자가 밥 짓는 연기가 올라가는 부잣집 굴뚝을 보면 더욱 허기가 커질 것이고 가난한 삶이 비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 신분에 걸 맞는 처신은 의무

경주 최부자와 구례의 류씨처럼 도덕적이고 나눔과 배려를 지닌 진정한 부자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있을까?

‘말 타면 종 부리고 싶다’는 속담이 있다. 인간의 본능은 부자가 되면 명예를 얻고 싶어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명예를 돈으로 사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을 진정한 명예라고 할 수는 없다. 명예는 돈을 사는 것이 아니라 존경에서 나온다. 남들이 우러러보는 자리에 올라가서도 욕을 먹고 사는 사람에게 그 자리는 머무는 자리일 뿐 명예로운 자리라고 할 수 없다.

반면 사회적 지위는 낮아도 남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죽은 뒤에도 추모되며 교훈을 심어주기도 한다. 그들을 일컬어 사람들은 명예롭게 살다갔다고 한다. 그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받는 삶이 바로 명예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위치에 걸 맞는 처신을 해야 한다. 특히 다른 사람들로부터 주목받는 신분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그런 처신이 ‘의무’처럼 요구된다.

부자가, 권력자가, 고위직에 오른 자가 처신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권리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따라야 할 의무인 것이다. 그것은 그런 신분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의 한 부분이고, 그를 받치고 있는 민중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높은 신분에 따르는 정신적 의무, 자신의 직분에 걸 맞는 처신을 프랑스어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한다. 그 말을 영어로 해석한 격언은 'The nobly born must nobly do'이다. 즉,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고귀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