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리회의 전경

◆미국은 와트닷컴 시대 개막
“IT산업의 경쟁구도가 성능경쟁에서 에너지 효율경쟁으로 전환되고 있다.”(인텔의 패트 젤싱거 수석 부사장)

“에너지 효율 제고를 위한 기술투자가 기업성장과 경쟁력에 직결될 것이다.”(GE의 이멜트 회장)

미국 포춘지가 에너지 효율 개선을 강조하는 선진기업의 CEO의 발언을 지면에 소개한 것은 달라진 시대 변화를 알리는 단초에 불과하다.  이제 ‘제3의 이데올로기’로 불리우는 환경 문제가 세계경제 질서 재편의 잣대로 자리매김했다.

선진기업들이 앞 다퉈 에너지효율 개선에 매달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효율 시장 확대는 지표상으로도 확연이 드러난다. 미국의 하이브리드 자동차 시장은 5년 만에 20배 이상 커졌다. 93년도에 2%에 불과하던 EU의 고효율 에너지제품 시장점유율은 2003년에 50%선에 육박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15년이 되면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신흥시장이  1,50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나다봤다.

EU는 2010년까지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총 에너지 소비의 12%, 발전부문의 21%까지 늘려잡고 산업계에게 정책 지원을 아낌없이 쏟아 붓고 있다.

기업차원에서도 신재생에너지 투자가 크게 확대되는 추세다. 미국의 실리콘밸리는 와트컴(wattcom) 붐이 신재생에너지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막대한 벤처캐피털 자금이 새로 열린 와트컴에 몰리고 있는 것은 이채롭다. 바야흐로 ‘닷컴의 시대’가 시들해지고 ‘와트컴’의 시대를 맞은 것이다.

전력단위를 뜻하는 와트에 컴을 붙인 와트컴은 IT산업의 닷컴 신화와 대비해 표현하는 것으로 풍력 태양광 수소에너지 등 신재생에너지를 지칭한다.

다국적 기업들도 신재생에너지 사업에 본격적으로 출사표를 내놓았다. BP사는 태양광 풍력 바이오 연료사업에 8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샤프사는 태양전지 분야에 70억엔을 투입,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세계 수요에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기후변화 관련 온실가스 산업의 등장도 기업 활동영역의 외연을 넓히는 수단이 되고 있다. 기업의 에너지 설비 투자와 운영을 대행하는 에스코사업, 컨설팅, CDM 중개, 인증 등 온실가스 감축을 둘러싼 새로운 비즈니스가 생겨났다. 

기존의 사업 모델과는 판이한 양상을 띠는 온실가스 감축 사업이 돈을 버는 탄소시장으로 바뀌자 하루가 다르게 기후변화 파생상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교토메카니즘 자체를 사업 아이템으로 삼아 수익을 내는 기업도 증장했다.

신호철 에너지관리공단 기후대책실 정책위원(공학박사)은 “2005년부터 CDM사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2006년 5월말 현재 전세계적으로 744개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며 “이중 신재생에너지 분야가 가장 많은 58%를 차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신 위원은 “톤당 이산화탄소배출권을 5달러로 가정하면 2012년까지 5조원의 탄소시장이 형성될 것”으로 전망했다.

◆환경경제 경쟁 주도권 치열
경제 질서의 개편을 주도하는 변화의 중심에는 기후변화협약이 자리한다. 기후변화협약은 ‘지구온난화와의 전쟁’이라는 대의명분에서 출발했지만 온실가스 감축량과 시기 등이 직접적으로 자국에 미치는 경제효과가 달라지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경제 전쟁’의 전초기지다.

기후변화당사국 총회 때마다 연출되는 진통과 치열한 공방은 세계경제를 둘러싼 주도권 다툼의 연장선상이다.

EU가 환경문제를 내세워 강력한 온실가스 감축안을 밀어붙이는 것도 그 이면에는 그동안 축적된 에너지관련 기술을 무기삼아 세계경제의 주도권을 움켜쥐려는 ‘음모’가 깔려있다.

고효율 제품과 신재생에너지 기술을 앞서 확보한데다 탄소시장 등 금융 산업이 발달한 국가가 버티고 있는 EU에게는 온실가스시장이 그야말로 ‘풍요의 땅’이다.

이에 반해 산업구조가 취약한 국가에게 온실가스 감축 부담은 치명타를 안길수 있다. 실제 에너지경제연구원은 우리나라가 2015년 온실가스 배출을 전년보다 10% 줄이면 GDP 0.32%(2조 7000억원), 20%를 줄이면 0.62%(5조 6000억원)가 각각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1995년 대비 온실가스를 5% 감축하려면 2013년 이후에는 해마다 49억달러의 비용이 들 것으로 분석했다.

이처럼 국가경제의 명암을 좌우하는 기후변화협약은 올해를 기점으로 국가간 ‘환경 경제전쟁’양상이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예측된다.

교토의정서에 따라 선진국들이 2012년까지 1차 온실가스 감축에 나서는 첫해라는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각기 셈법이 다른 동상이몽의 세계 각국 대표들은 지난해 발리에서 끝난 기후변화당사국 총회에서 2012년 이후 선진국과 개도국 모두가 온실가스를 줄여야 나가는데 합의하는 의미있는 방점을 찍었다. 

자발적이냐 비자발적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국가가 온실가스 감축에 나서는 이정표를 세운 것이다.

협상의 결과물인 ‘발리 로드맵’에는 교토의정서의 1차 공약기간이 끝나는 2012년 이후 체제를 어떤 방식으로 구축해나갈 것인지에 대한 밑그림과 향후 일정에 대한 틀이 담겼다.

그간 교토의정서에서 벗어난 미국까지 포함한 모든 선진국들이 오는 2009년까지 교토의정서상 의무 감축에 상응하는 노력을 하기 위해 협상을 진행하고 개발 도상국들도 자율적 감축에 대해 협상한다는 내용에 합의했다.

따라서 2012년 이후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전 세계 모든 국가들이 온실가스 감축 활동에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도 예외일 수 없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개발도상국 지위를 누렸다. 97년 채택된 교통의정서에서도 온실가스 감축의무를 용케 피했지만 향후 감축 방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가 집중적인 공격타깃이 될 가능성이 더 커졌다.

온실가스 연 배출량 세계 9위, 누적배출량 23위, 국내총생산 세계 10위권이라는 두드러진 수치와 국제적 지위로 인해 우리나라는 국제사회의 이목을 받기에 충분하다. 

EU를 비롯한 지구촌의 압력이 더욱 거세져 더 이상 개발도상국이란 ‘커튼’ 뒤에 숨어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제 기후변화 협약은 ‘먼 산의 불’이 아니라 직접 부닥쳐 해결해야 할 ‘발등의 불’이다.

◆안이한 대응은 재앙 불러

발리 로드맵이 채결된 지난해 말 정부는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종합대책을 마련, 발표했다.

정부가 밝힌 대책의 핵심은 온실가스 배출량을 일정 수준 이하로 규제하고 목표치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는 탄소 배출권을 매입토록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원자력 발전소 등 청정 에너지 비율을 높이고 친환경 기술 분야 투자를 확대키로 했다는 게 주요 골자다.

정부의 대책에 대해 에너지전문가들은 ‘방향성’에 맞춰 ‘실효성’있는 결과물을 얻기 위해서는 정부가 극히 취약한 기후변화 대응 기반을 빠른 시일 내에 새롭게 다져나갈 것을 주문했다.

온실가스배출 속도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는 현실 속에서도 일부 대기업을 뺀 대다수 산업체가 너무 안이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

시민단체의 한 관계자는 “ 기후변화협약 대응이 범정부적 차원에서 치밀하고 주도면밀하게 추진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부처간의 간극이 여전히 남아 있어 안타깝다”면서 “현 국무총리실 기후변화대응기획단의 역할을 대폭 키워 부처간의 통합과 조정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까운 현실이다

에너지경제 전문가들은 고에너지 저부가가치 산업구조를 개선하지 못하면 기후변화 협약에 의해 구조조정을 당할지 모른다고 거듭 경고하고 있다.

한 전문가는 “앞으로 부여될 온실가스 감축 목표가 기업에게는 큰 시련이지만 대비하기에 따라서는 새로운 기회를 창출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점을 역설했다.

이 전문가는 “경제와 환경을 따로 떼어내 생각할 수 없는 시대에 기업이 경쟁력을 갖는 좌표는 ‘환경친화적 기업’이다”라고 규정지었다.

민승규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클린 엔드 그린 비즈니스’등 환경관련 산업이 차세대 성장 동력이 되도록 공격적인 투자 확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 수석연구원은 “오는 2010년 전세계 환경산업 시장규모는 8,635억 달러로 2000년 대비 1.7배 확대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환경산업이 한국경제의 특화산업이 될 수 있도록 투자환경을 개선해야 한다”고 밝혔다.

에너지 절약 기술과 신재생에너지 기술을 개발하고 보급하는데 투자를 늘려야 한다는 의견도 전문가들이 주장하는 단골 메뉴다.

학계의 K교수는 “기술에서 앞선 선진국을 따라잡지 못하면 장기적으로 기업과 국가의 잠재성장력이 훼손될 수 밖에 없다”면서 “현재와 같은 백화점식 기술개발 지원방식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거둘 수 없기 때문에 선택과 집중이 어느 때보다 요구 된다”고 강조했다.

발리 회의에 참석했던 NGO관계자는 “회의장 안에서 우리나라의 존재감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고 단지 유엔사무총장이 한국인이라는 것만이 우리나라를 대변했다”며 당시를 전하고 “ 국제회의에서 우리나라의 목소리를 높일 것”을 주문했다.

앞으로 세계 각국은 2009년까지 교토의정서보다 강력한 감축방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자국의 손실은 최소화라고 이익은 최대한 끌어올리는데 매진할 것이다.

협상 테이블에서 우리의 입장을 최대한 반영하는 협상력을 키워 나가는 한편 기업과 정부의 탄탄한 대비가 요구되는 때다.

세상사가 그렇듯 위기는 항상 기회와 함께 온다. 준비부족으로 기후변화에 발목을 잡혀 주저 앉을 것인가, 새로운 기회를 잡아 도약할 것인가는 결국 우리 손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