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눈 뜨고 당할까?
사기꾼은 많은 사람들에게 같은 방법으로 접근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소에 부치던지 묵살한다. 사기꾼은 그런 것에 실망하지 않는다. 반응을 보이는 소수의 사람만 잡으면 되기 때문이다. 사기꾼의 접근에 대해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나에게만 이익이 되는 일’을 찾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사기를 당하는 피해자들은 지능이 낮은 것일까? 수사관들은 한결같이 “사기사건 피해자들을 조사하다 보면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다. 저렇게 빈틈없고 많이 배운 사람이 어떻게 당했을까 하는 의문이다”라는 말을 한다.

그렇다면 왜 당했을까? 그것은 대박 신화와 신데렐라의 꿈을 꾸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기를 당하는 순간에는 사리분별을 제대로 하기가 어렵다. 꿈에 취해있는 이들에게는 사기꾼도 모두 건실한 사업가,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로 보인다. 꿈에서 깨지 못 한 상태라면 눈 뜨고도 당하는 것이 사기이다.

■나 이런 사람이야!!
CIA 물 먹인 검사=지난해 2월 자신의 신분을 CIA(미국 중앙정보국) 동아시아 담당관이라고 소개한 H는 경남지역의 한 조선업체에 “CIA가 관리하는 비자금 30조원을 한국으로 유입시킬 계획인데 이 중 1,000억원 가량을 지원하도록 해 주겠다”며 리베이트와 활동비 명목으로 19억원을 가로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죄로 구속됐다.

남편의 형량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었던 H의 부인 앞에 나타난 사람은 자칭 검사인 C씨.
그는 “담당 검사와 판사에게 선처를 부탁해 구속된 H의 석방을 돕겠다”며 청탁과 접대비 명목으로 모두 12차례에 걸쳐 1억6,500만원을 가로챘다가 검거됐다. CIA요원을 사칭한 사기꾼이 검사를 사칭한 사기꾼에게 사기를 당한 웃지 못 할 사건이다.

남편도 속은 국정원 비밀요원=지난 2월에는 국가정보원 비밀요원을 사칭, “비자금으로 쓸 어음할인에 자금을 대면 25%의 이자를 챙길 수 있다”며 부모와 동창생, 친지들로부터 수억원을 뜯어낸 30대 주부 L씨가 경찰에 붙잡혔다.

L씨는 지난 1999년부터 청와대에 파견 근무한 국정원의 자금담당 비밀요원으로 행세해 왔으며 본인의 부모, 시부모, 친척, 친구는 물론이고 남편조차도 L씨가 국정원 비밀요원이라고 믿고 있었다.

L씨는 아들의 돌잔치 때나 본인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국정원 직원 명의로 꽃바구니를 배달시켜 가족과 친지들이 보도록 하는 식으로 믿게 만들었으며 명함이나 신분증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안규정을 들먹이며 위기를 모면했다. 그녀는 경찰청에 출두해 조사를 받을 때까지도 자신을 국정원 직원이라고 주장했다.

판사부인으로 둔갑한 파출부=파출부로 판사, 변호사 등 법조인들의 집을 드나들었던 L씨는 판사 부인을 사칭하며 사기행각을 벌이다 구속됐다.

L씨는 우연히 알게 된 K씨가 “직장 상사와 갈등으로 전직을 고려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대전지법 판사인 남편에게 잘 말해 직장을 알선해 주겠다”며 사례비를 요구했다.

K씨는 절박한 심정에 속아 넘어갔고 L씨는 “대전에서 취업을 하게 되면 집이 필요할 테니 법원경매에서 값싼 아파트도 구해 주겠다”며 또다시 K씨를 속였다. 이렇게 뜯어낸 돈이 1억2,000만원. K씨는 L씨에게 지인들까지 소개해 취업 등을 미끼로 1억7,000만원을 뜯겼다.

조종사가 된 사기꾼=조종사를 사칭해 부녀자로 부터 돈을 뜯은 K씨는 “비행을 마치고 와 보니 전화번호 메모가 있어서 전화를 했다”며 S씨에게 접근했다. K씨는 통화하는 도중에 “잠깐 기다리라”고 한 뒤 영어로 기내 안내방송과 비행기 소리 등을 흉내 내고 자신의 숙소로 S씨를 데려가 항공관련 전문서적들과 항공사 제복 등을 보여주는 식으로 치밀하게 S씨를 속였다. K씨는 S씨를 만날 때마다 “비행을 마치고 바로 오느라 달러만 있다”며 돈을 받아 챙기는 수법으로 11차례에 걸쳐 2,700만원 상당을 편취한 혐의를 받고 있다.

공금을 분실한 장교의 SOS=육군 중령 행세를 하던 A씨는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S씨와 친분을 쌓아갔다. A씨가 S씨를 만나고 있을 때 부대 원사로 위장한 공범 L씨가 나타나 공금이라며 A씨에게 돈 봉투를 건넸다.

다음날 A씨는 다급한 목소리로 S씨에게 전화를 걸어 “어제 받은 공금 8,000만원을 분실했는데 채워 넣지 못하면 구속된다. 그래서 급전을 구하고 있는데 1,000만원이 조금 넘게 부족하니 빌려주면 대출을 받아 갚겠다”고 속여 1,179만원을 받아 챙겼다.

L씨의 또 다른 공범 B씨도 나이트클럽에서 I씨에게 접근해 A와 같은 수법으로 사기행각을 벌였다. 이렇게 뜯어낸 돈이 3,200만원.

범행 장소를 옮긴 L과 B는 울산의 나이트클럽에서 한 여인을 만나 같은 수법으로 사기를 벌여 카드를 받아낸 뒤 2,000만원을 인출, 도주했다.

이들은 공금을 분실해 구속되거나 파면된다는 식으로 위기감을 조성한 뒤 급박한 상태에서 얼떨결에 피해자들이 따라오게 만드는 고도의 수법을 썼다.

또한 분실금액 전부를 뜯어내지 않고 어느 정도는 자신들이 해결한 상태에서 나머지 금액만 빌려달라는 식으로 돈을 요구해 상대적으로 적은 금액이란 인식을 심어 부담감을 덜어주고 군인신분으로 퇴직금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곧 갚겠다는 식으로 피해자들을 안심시킨 뒤 돈을 찾아 달아나는 치밀한 수법을 쓴 것으로 드러났다.

■사기는 고도의 심리전이다
영화 ‘범죄의 재구성’에서는 사기꾼의 수법을 이렇게 말한다. “사기는 테크닉이 아니다. 심리전이다. 그 사람이 뭘 원하는지 그 사람이 뭘 두려워하는지 알면 게임 끝이다”

사기꾼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너무나 쉽게 간파한다. 돈 아니면 힘 둘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권력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권력을 등에 업을 수 있을 것처럼 큰돈을 벌고 싶은 사람에게는 크게 한탕 터뜨릴 수 있을 것처럼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는 문제를 해결해 줄 것처럼 하면 된다.

어떠한 신분을 사칭한 사기범죄가 줄어들지 않는 것도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뻔히 들여다보이는 수법이라도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안고 들어오면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사기를 치려면 상대방이 두려워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상대방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혹시 내가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다. 그렇다면 사기꾼들은 상대방이 속는 게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할 무언가만 건네면 얼마든지 사기를 칠 수 있다는 말이다.

사기꾼들은 현란한 화술로 상대방을 믿게 만든다. 아울러 상대방이 바라는 지위를 만들고 그에 부합되는 용모를 꾸민다.

여기에 전문지식으로 포장, 상대방을 믿게 한다. 상대방이 절대로 속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주면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사기를 칠 수가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사기꾼들은 완벽한 시나리오를 짜낸 뒤 완벽한 소품과 의상 필요하다면 조연과 엑스트라까지 갖추고 달려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