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배 건국대학교 전기전자공학부 교수 <2024 석학의 신년 제언>
“ 새로운 체계와 거버넌스 도입하지 않으면 
현재의 송전망 문제는 해결되기 어려우며, 
결국 그 피해는 소비자에게 돌아갈 것이다 ” 

박종배 건국대학교 전기전자공학부 교수

해가 가고 해가 오는 이맘 때가 되면 작년에 있었던 일들을 되돌아 보고 잘한 일, 못한 일을 마음에 새기고 새해에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작년에 했어야 하는데 하지 못했던 일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본다. 새해에는 우리 전력산업계에얽히고 설켜 있는 문제의 실타래가 하나씩 하나씩 풀어지기를 소망한다. 끝나지 않고 있는 러-우 전쟁과 새로이 발발한 이-팔전쟁, 홍해 항로에서 대두된 리스크는 유가와 천연가스의 지속적인 가격상승을 불러왔고 그로 인한 지난 2년여 동안 누적된 한전의 재무적 충격이 워낙 커, 유가와 천연가스의 가격이 다소 진정되었음에도 재무적 불안은 지속되고 있다. 우리나라 전력산업이 정상화되려면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계속되고 있는 이런 전력산업의 위기 속에서도 전력이 안정적으로 공급되고 있고, 재무적 위기가 전력망의 물리적 위기로까지는 파급되지 않고 있는 건 참으로 다행한 일이지만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다. 

우리나라의 전력공급 안정성과 품질은 선진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보기 힘들게 우수하다. 우리나라의 가구당 정전 시간은 8.92분(’21년)에 불과하다. 독일 13.91분(‘16년), 영국 46.5분(’16년), 프랑스 52.6분(‘16년), 미국 284분(’19년) 등과 비교하면 적게는 1.5배, 크게는 30여배 더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전력품질의 주요 지표인 전압과 주파수 유지율이 99.9%에 달하며 대규모 정전도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2011년에 순환정전이 발생하였지만, 유럽, 북미, 호주 등에서 지금도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는 광역 정전에 비교할 바는 아니다. 우리나라 전기 소비자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서비스를 받고 있고, 전기요금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에서 가장 저렴한 수준이다. OECD에 따르면, 작년 우리나라 주택용 소비자의 전기요금은 OECD의 평균보다도 84%나 저렴하고, 산업용 전기요금 또한 저렴하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소비자는 가장 좋은 품질의 전기를 가장 저렴하게 공급받고 있는 셈이다. 

최근 우리나라 전기요금이 해외보다 몹시 저렴한 것은 한전과 우리나라 전력산업의 경쟁력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한전이 전력구입비 이하로 전력을 판매하고 있기 때문이며 ‘21년 이후, 불과 2년여 기간의 누적 영업적자가 45조원, 누적 부채는 201조라는 사실이 현재의 상황을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다. 안정성의 측면에서는 우리나라 신재생 비중은 OECD 평균인 31%보다 한참 낮은 8%에 불과하여 간헐성이 전력계통의 안정성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역설적 상황이며, 더불어 전력계통 신뢰도 기준을 주요 송전망의 2회선 탈락이라는 높은 수준으로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배전선로의 작업은 전력을 공급하고 있는 상태에서 수행하였다. 공급 안정성을 높이기 위하여 안전을 댓가로 지불한 것이다. 

1990년 대비 작년 최대수요는 3.8배, 발전설비는 5.4배, 변전설비는 5.1배로 증가하였다. 반면, 송전선로는 1.5배 증가한데 불과하여 전국 곳곳이 동맥경화에 걸려있다. 송전망 부족으로 전국의 8군데에서 송전제약이 상시로 발생하고, 41곳에서 고장파급 방지장치가 설치되어 운영되고 있다. 대규모 송전망 건설이 어려워지기 시작한 시점은 신고리-북경남을 잇는 765kV 송전선 건설 사업에 따른 사회적 갈등, 이른바 ‘밀양 송전망 사건’으로 볼 수 있다. 해당 765kV 송전선로는 당초 계획보다 4여년 지연된, 2014년 9월에서야 완공되었다. 제9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반영되어 있는 송변전설비의 40%가 지연되고 있는 등 거의 모든 송전선로가 표준건설공기보다 늦어지고 있다. 송전망의 건설 지연은 안정적 전력공급은 물론이거니와 전기요금의 상승을 초래하여 우리나라 산업 경쟁력을 직&#8231;간접적으로 저해한다. 동해안-신가평 HVDC 송전선로의 건설 지연으로 동해안의 저렴한 원자력, 석탄 발전 대신에 수도권의 비싼 LNG 발전을 해야 함으로써 한전의 연간 전력구입비의 증가액만 조(兆) 단위에 이르게 하고 있다. 신재생 출력제어가 상시 발생하는 제주는 물론이고 올해부터는 호남지역에서도 신재생과 원자력의 출력저감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송전망 건설 지연에 따라 대규모 손실이 발생하고 있는 발전사업자는 관련 기관에 대한 법적 대응에 까지 나서고 있다. 송전망 부족에 따른 제반 기술적, 경제적 문제점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데 사안의 핵심이 있다. 작년 발표된 제10차 전력수급에 따르면, ‘36년까지 송전선로는 현재보다 1.6배, 변전설비는 1.4배로 확장되어야 하며 이의 재무적 부담은 56조에 이른다. 여기에 배전설비 확장에 30여조원, 에너지저장장치(ESS)와 같은 유연설비 투자에 최대 45조원이 추가적으로 필요할 것으로 추정된다. 실로 천문학적인 투자 재원이 필요하다.  

전력 당국은 작년 12월, 전력계통 혁신 대책에서 핵심 송전망 건설기간의 30% 단축, 분산화 등을 통한 송전선로 건설규모 10% 축소, 계통 유연성 2배 증가라는 목표를 설정하였다. 송전망 포화 문제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에서 적기에 수립된 대책이다. 이는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의 제정을 통하여 적극적인 민원 대응과 수요자 맞춤형 보상, 인허가 및 환경규제 등의 특례 확대에 기반을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력망 투자에 민간의 자본과 역할의 증대, 즉, 송전망의 운영은 한전이 하되 인허가, 민원 대응, 시공 등에 민간이 참여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를 위한 특별법의 제정이 요구되는데 여야의 정쟁이 첨예하고, 송전망 건설에서 민간 역할의 증대는 민영화 논란으로 번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새로운 체계와 거버넌스를 도입하지 않으면, 현재의 송전망 문제는 해결되기 어려우며, 결국 그 피해는 소비자에게 돌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