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경제연구원 미래가 지속가능한 미래다

20년 전 에너지경제연구원 현판식을 달 때는 연구원의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겨를이 없었다. 연구원 설립 사실 자체가 믿기 어려웠다. 80년대 초 정부조직 통폐합 조치로 정부출연연구소가 대폭 줄어든 여건에서 새롭게 에너지경제연구원법이라는 특별법에 의한 출연연구기관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의 출범은 정부 연구개발정책에 방향전환의 계기를 제공했다.

그 당시 에너지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원유가는 폭락하고 있었으며 최대의 관심사는 하한선의 위치였다. 언론도 에너지는 더 이상 문제로 다루지도 않았다. 그런 여건에서 에너지정책 연구기관이 문을 연 것이다. 연구원 창설을 지지해 준 정부당국자와 특별법을 의결한 입법부는 정말 소신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연구원 출범에는 많은 사람의 도움이 있었다. 연구원 설립은 과기처 산하 동력자원연구소의 정책연구부가 독립하는 과정이었다. 딴 살림을 차리겠다는 것이니 동력자원연구소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동자연 소장 박긍식 박사는 전적으로 에너지정책연구 중요성에 공감했고 분리 독립을 지지했다. 조직을 확장해야만 유능한 기관장으로 인정받는 여건에서 어려운 판단이었다. 떠나는 정책연구부가 자산 인력 등 모든 면에서 순항하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에너지경제연구원 현판식 장소는 장안동이었다. 장안동 건물은 원래 동자연 태양에너지실험 시설로써 정책연구부는 3년 전부터 이 건물을 쓰고 있었다. 주택가에 위치한 이 실험시설은 보통 건물이 아니었다. 태양에너지 실험을 목적으로 디자인됐기 때문인지 햇볕은 건물전면에 자리 잡은 온실로 집중되고 사무실에서는 전혀 햇볕을 구경할 수가 없었다. 단독가옥과 연립주택으로 둘러싸인 연구소 주변 좁은 길에서는 아침 10시와 오후3시에 어김없이 배추장수, 과일장수, 폐지수집상, 자칭 산지직송 해산물 판매상 등의 리어카 순회 마케팅이 있었다.

거기에다 장안동에서 동력자원부 등 정부청사가 있는 과천까지는 너무 먼 거리였다. 회의참석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랐다. 연구소에 걸 맞는 곳으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

지금의 의왕 청사는 원래 한전 땅이었다. 당시 동력자원부 이봉서 장관은 한전 안병화 사장에게 의왕에 있는 한전 소유 부지를 에너지경제연구원에 양도하는 방안에 대한 검토를 지시했다. 이봉서 장관은 연구원 신청사 필요성에 어느 누구보다 공감하면서 즉시 전력국장을 불렀고 안 사장과의 회동을 지시했다. 이렇게 낙하산은 투하됐지만 그 땅에 발을 디디기까지에는 땅 주인 식구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하기야 내가 땅 주인이라도 그렇게 했을 터이다. 여하간 안 사장은 에너지경제연구원에 호의적이었다. 이런 저런 규정을 들어 “아니 되옵니다”를 외치는 충신들의 읍소를 달래가며 에너지경제연구원에 2,500평을 선물했다.

연구원이 새 청사로 이사 가는 날 아침, 중동에서는 전쟁이 터졌다. 미국이 사담 후세인을 쿠웨이트에서 쫓아내는 ‘사막폭풍’ 작전이었다. 정밀폭격, 외과수술적타격, 지능형 폭탄 투하… 만화 같은 장면이 실시간 중계되는데 의왕 신청사로 이삿짐 트럭들과 함께 신문사 방송사의 취재차량과 카메라 장비들이 밀어닥쳤다.

연구원 이사를 취재하자는 것은 아니고 중동전쟁이 세계에너지시장과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취재하고 자문을 구하는 행렬이었다. 86년 에너지경제연구원이 창립됐을 때 어느 누구도 5년 뒤 중동의 이런 극한적 혼돈을 예상할 수는 없었다. 석유가격은 저가행진을 계속했다. 에너지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고 관심 밖이었다. 그 기간 동안 한국에서 에너지문제를 걱정하고 24시간 전문적 분석에 매달린 사람은 4,500만 인구 중 에너지경제연구원 소속 100명 미만의 연구원이 전부였다. 에너지경제원구원은 ‘준비된’ 연구원이었다.

연구원의 생명은 사회를 일깨워 주는데 있다. 2천년전에도 그랬지만 진정한 예언자는 핍박을 받게 마련이다. 혹시라도 에너지경제연구원을 폄훼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연구원이 예언적 기능에 충실했다는 반증이다. 14년 전 에너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한 편의 논문은 우리나라의 전력정책을 정밀폭격했다. 한국 전력산업에서 규모의 경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독점에서 경쟁체제로의 전환은 사회적 효율을 제고한다는 실증적 분석으로서 한국전력산업개편의 당위성을 과학적으로 입증한 최초의 논문이었으며 결국 새로운 전력정책 방향의 기폭제가 됐다.

한전의 분노는 의왕과 과천관가를 향한 쓰나미였다. 한편 에너지경제연구원의 분석기조와 파급력을 알아차린 가스공사는 방어책 마련에 들어갔고 그 결과 ‘가스공사 구하기’ 연구용역은 큰 산업으로 성장하게 됐다.

지금 천연가스도입은 가스공사의 전유물은 아니다. 이것이 바로 10여년 전 에너지경제연구원이 분석했던 미래 우리나라 가스 산업의 합리적 방향이었다.

70년대 초 우연히 에너지 연구와 인연을 맺은 것이 나의 생업이 됐다. 에너지 연구는 이제 제3의 분기점을 맞이한 것 같다. 원래 자원에너지연구는 수급 불안문제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실증적 연구는 에너지자원을 비롯한 천연자원의 희소성을 입증할 수 없었으며 천연자원은 경제발전의 제약요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환경의 희소성이었다. 환경의 흡수능력 한계성은 에너지자원 이용을 직접적으로 제약하게 됐다. 기후변화 문제는 저탄소고효율 에너지구조의 등장을 불가피하게 하며 에너지인프라의 혁명적 변화를 예고한다. 환경문제로 제기된 기후변화는 에너지 이슈가 되었으며 기후변화 대응책은 바로 에너지대책이 된다. 이제 다음의 분기점은 지구생태계서비스의 희소성이다. 기후변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지구생태계의 생명부양시스템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다. 지구생태계 서비스의 가치를 경제발전과 에너지선택 결정에 포함하는 연구가 시작되고 있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은 18년 전 한국 최초로 기후변화 대응책 연구를 시작한 연구소로서 이 분야에 큰 기여를 했다. 제3의 분기점에서 에너지경제연구원의 리더십을 기대한다.

이제 20주년을 맞이하면서 에너지경제연구원의 미래야말로 지속가능한 미래라는 것을 확신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