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기업의 핵심기술을 빼돌리는 산업스파이의 상당수는 다름 아닌 전.현직 내부직원이다. 당한 기업으로서는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 셈이다.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가 조사한 '기업연구소 산업기밀관리 실태'를 보면, 최근 3년간 산업기밀의 외부유출로 피해를 입은 기업의 산업기밀 유출관련자는 퇴직사원이 63.5%로 가장 많았으며, 현직사원(17.7%), 협력업체 직원(15.6%), 경쟁업체 직원(11.5%)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고락을 같이 하던 동지에서 한순간에 적으로 돌변한 내부직원에 의한 기술유출 사례와 원인 등에 대해 알아본다.

◆ 敵은 內部에 있었다
▶ 자동차 금형설계 제작업체인 D사에 근무하던 최모씨와 박모씨는 퇴사 전  D사의 기술을 빼돌려 회사를 설립하고 중국 등 해외 경쟁업체에 제품과 설계도면 파일을 판매했다.

▶ 이모씨는 영업부장으로 근무하던 A사가 개발한 휴대폰 시험기기 설계도면 등을 불법으로 빼돌려 사업체를 차린 뒤 A사의 거래처에 기기를 납품했다.

▶ T사에 근무하던 유모씨는 T사의 국립중앙박물관 진열장 설치관련기술을 빼돌린 뒤 경쟁업체인 E사의 기술영업과장으로 입사하면서 T사의 영업비밀을 E사에 유출했다.

▶ 중국의 경쟁업체로 이직한 윤모씨는 전에 근무하던 회사가 개발한 차량 AV시스템 설계도와 회로도 등을 빼돌려 중국 업체에 제공했다.

▶ 유명 냉면집에서 십수년 째 일하고 있던 주방장이 모 대학 식품과학부 교수에게 육수 맛 비결을 가르치다 이 식당 사장에게 발각됐다.

▶ 스팸메일방지 특허기술을 보유한 N사의 기술지원팀장으로 근무하던 김모씨와 권모씨는 일본 경쟁사인 C사에 취업하는 조건으로 N사의 특허기술을 빼돌려 C사에 넘겼다.

▶ S전자 무선사업부 선임연구원 이모씨는 카자흐스탄의 한 업체로 연봉 3억 원을 보장받고 이직하기로 한 뒤 S전자의 핵심기술 회로도를 유출해 넘겨주기 직전 적발됐다.

▶ 3.5세대 이동통신 관련기술을 개발한 E사에서 근무하던 임모씨는 퇴사 전 설계기술 자료 등이 담긴 파일을 빼돌린 뒤 국내외 경쟁업체로 이직을 시도했으나 E사의 신고로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 S전자 직원 박모씨와 연구원 출신 배모씨는 TFT-LCD(초박막 액정표시장치)관련 핵심기술을 빼돌린 뒤 중국에 공장설립 계획을 세우고 필요 인력확보를 위해 S전자 전·현직 연구원에게 고액연봉을 미끼로 스카우트를 제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 바이오 환경기업 B사의 기술이사 O씨는 중국에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계 하청생산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국지사장과 공모하여 설계도면과 특허서류 등 기술자료 일체를 빼돌린 뒤 중국에 설립한 K사 명의로 중국정부에 특허를 출원하기도 했다.

▶ 페인트 제조 첨단기술을 갖고 있는 H사의 연구원 이모씨 등 직원 4명은 중국 업체로부터 높은 연봉과 회사 지분제공, 3백60만 달러를 받기로 하고 이직하면서 H사가 보유한 첨단기술을 중국의 업체로 유출시켰다.

◆ 기술을 빼돌리는 이유는 돈
내부직원에 의한 핵심기술 유출은 기업에 큰 타격을 입힌다. 그들이 기술을 빼돌린 이유를 파악하고 대처하지 못 하면 내부직원에 의한 기술유출 사건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몸담았던 회사의 기술을 빼돌리는 이유는 크게 고용보장과 돈 때문이다. 구조조정이란 칼바람은 많은 직장인들을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이게 하고 있다. 직원들의 회사에 대한 충성도도 빈약해졌다.

근로자들의 의식도 많이 변화했다. 과거에는 회사와 직원의 관계가 하나의 운명공동체였다면 현재는 노사라는 거래관계가 된 것이다. 근로자의 입장에서는 회사가 언제 나를 해고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회사를 위해 희생하기보다는 회사에 기여한 만큼 대가를 받겠다는 권리를 당당히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상당수의 기업에서는 아직도 보수나 승진 등에서 연구원이나 엔지니어 같은 기술인력보다 관리직을 우대하는 게 사실이다. 그러한 구조에서 기술인력들은 회사가 기여도를 제대로 평가해 주지 않거나 적절한 보상이 따르지 않는다면 처우에 불만을 품게 된다.

신분이 불안하고 처우가 불만이 있는 상황에서 고액연봉과 승진, 고용이 보장된 스카우트 유혹은 성실하던 연구원이나 엔지니어를 쉽게 산업스파이로 변화시키게 된다. 불법적이고 비도덕적인 발상이지만 그들로써는 회사가 인정해주지 않는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찾겠다는 심리도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 또한 ‘대박’을 부채질하는 사회풍조 하에서 큰돈을 벌어보겠다는 한탕주의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로 꼽힌다.

◆ 기업의 허술한 보안체계도 문제
내부직원이 기술을 유출하는 이유 중에는 간과할 수 없는 것이 기업들의 허술한 보안상태다. 보안체계만 확실하다면 애당초 내부직원이 기술을 빼돌릴 생각을 못 하게 만들 수도 있다. 설사 행동에 옮기더라도 쉽게 적발하여 기술유출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국내 기업들의 기술보안 상태는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거의 무방비 상태라고 봐도 무방하다. 우리나라 기업 중 72%는 매출액의 1%도 안 되는 금액을 보안 분야에 투자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보안에 대한 개념조차 없는 기업도 있다. 핵심직원이 퇴직했는데도 내부 전산망 암호와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아 기술을 유출당한 사례도 있었다.  

기업의 보안체계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지만 기술을 빼돌리는 수단과 방법은 날로 발전하고 있다. 설계도면이나 각종 문서의 디지털화로 인해 자료를 은닉하거나 유출이 용이한 것도 기술 빼돌리기를 부채질하고 있다. IT인프라 구축과 인터넷, 노트북, 메모리스틱, 외장형 하드디스크, P2P, DVD, 카메라 폰, 휴대형 메모리 등 디지털 저장.전송 수단도 기술유출을 쉽게 하고 있다. 웹하드처럼 대용량 파일을 저장할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들도 산업스파이들에게는 유용한 수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