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스파이, 안전지대는 없다.
경쟁이 치열해 질수록 산업스파이는 기승을 부린다. 산업스파이의 수법도 날로 진화하고 있다. 시설 잠입, 문서 절취나 복제, 도청, 녹음이나 타킷으로 삼은 기업의 임직원을 포섭하기 위한 미인계, 매수, 납치, 협박, 스카우트 등은 이미 널리 알려진 고전적인 수법. 근래에는 합법적 인수, 경영컨설팅이나 기술자문, M&A를 가장한 경영실사, 매개회사 이용, 위장취업, 기술협력·공동연구, 해킹 등과 같은 고도의 전략이 동원되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 접근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의도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한 것을 알기 이전에는 피해여부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첩보영화의 한 장면 같은 기업 간 정보전쟁은 이제 현실적인 이야기다. 산업스파이 세계에서 더 이상 안전지대는 없다. 이번 회에는 산업스파이들의 수법에 대해 알아본다.

◆ 퇴사 직원에 의한 기술 유출
현재 산업스파이 사건의 80% 이상이 전·현직 임직원에 의해 발생하고 있다. 고액연봉·승진보장 등을 내세운 국내외 경쟁사로 옮기면서 빼돌리는 경우가 가장 많고, 퇴사 후에 전에 다녔던 기업의 첨단기술을 불법 도용해 창업한 경우가 그 뒤를 이었다.
현재 근무 중인 직원이 경쟁기업에 매수돼 기술만 빼돌리는 사건도 최근 들어 자주 발생한다. 경쟁사의 스카우트로 전직하거나 퇴사직원의 기밀도용 사실을 적발 하더라도 법적 분쟁의 여지가 생긴다. 연구원의 경우 입사 전 갖고 있던 지식과, 입사 후 얻은 지식, 퇴사 후 새로 취득한 지식간의 구별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 훔치기
보안이 허술한 기업의 내부에 잠입해 원하는 자료나 제품을 훔치는 것은 고전적인 방법이면서도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산업스파이 행위. 기업 내부로 몰래 들어가는 게 힘들 경우 상대적으로 보안이 취약한 운반 과정 중에 훔치기도 한다.
LG전자는 2000년 3월 독일에서 열렸던 전시회에 출품했던 60인치 PDP TV를 프랑크푸르트공항에서 뉴델리공항으로 옮기다 도둑맞았고, 삼성전자도 이듬해 4월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방송장비전시회에 출품하려던 63인치 PDP TV를 호텔에서 도난당했다.
이 두 사건이 방범시설이 잘 갖춰진 장소에서 부피가 큰 물건을 훔쳤다는 사실을 보면 단순히 물건이 탐이나 도둑질을 했다고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밖에도 임직원이 사용하는 노트북컴퓨터도 표적이 된다. 때로는 외부로 들고 다니기도 하는 노트북컴퓨터에는 회사의 중요 정보가 수록된 경우가 많아 그것을 손에 넣기만 한다면 경쟁업체로써는 횡재를 잡는 셈.
따라서 노트북컴퓨터는 산업스파이들의 표적이 되었고 이 때문에 중요한 자료를 노트북에 저장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되었다.

◆ 투자를 미끼로 한 접근
자본력이 약한 기업은 투자자에게 약할 수밖에 없다. 투자유치를 위해 투자자에게 기술이나 영업기밀을 설명해야 하는 절차가 필요하지만 투자자의 본색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전자업체 S사는 대만의 한 캐피털사에 자신이 개발한 기술을 설명하고 투자유치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이 투자업체는 갖가지 이유를 대며 시간을 끌다가 결국 투자의향서를 파기해 버렸다. 6개월 후 S사가 개발한 것과 유사한 제품이 일본에서 팔리고 있었다.
제조국은 대만. S사의 기술을 도용한 주범이 투자협상을 했던 대만 투자자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상황이지만 손해를 배상받을 방법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이처럼 투자를 미끼로 접근해 알짜기술만 빼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 인수
경쟁기업을 무장해제 시키는데는 통째로 인수하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다. 물론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겠지만 거대자본을 앞세운 기업이라면 그것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최근 중국 기업들이 신기술을 보유한 우리나라 기업들을 인수하기 시작하면서 우려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제3세대 엔진인 ‘커먼레일 디젤엔진’을 개발한 쌍용자동차를 중국 상하이자동차그룹(SAIC)이 인수하면서 쌍용자동차의 최첨단 기술 노하우가 매각과 함께 고스란히 중국으로 넘어갈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중국으로써는 오랜 노하우가 필요한 자동차 엔진 개발기술을 인수라는 과정을 통해 손쉽게 얻게 된 셈이다.
기술 이전을 노린 중국 기업의 공략이 쌍용차가 처음은 아니다. 2002년 말 하닉스반도체의 TFT-LCD사업 자회사였던 하이디스가 중국의 BOE 테크놀러지 그룹으로 매각됐다.
또한 인수합병을 빙자해 접근한 뒤 새로운 주인 행세를 하며 경영실사를 명분으로 자료를 요구한 뒤 원하는 정보만 확보하면 계약을 파기해버리는 비열한 형태도 늘고 있다. 새 주인에게 약할 수밖에 없는 기업으로써는 눈뜨고 당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 경영컨설팅이나 기술자문
컨설팅사를 가장한 산업스파이 행위도 경계대상이다. 다국적 사설 정보업체들도 컨설팅 사 간판으로 본분을 감춘 채 은밀히 활동 중이다. 이들은 컨설팅에 참고할 것이라며 각종 기밀자료를 요구한 뒤 컨설팅사와 연결된 경쟁업체로 넘기기도 한다.
실제로 세계 굴지의 자동차업체가 경쟁사인 우리나라 업체의 경영컨설팅을 하는 자국의 회사를 통해 경영전략과 시장분석 자료, 기술 정보 등을 입수하려고 시도했으나 관계당국이 이를 인지하고, 컨설팅사의 음모를 업체에 통보함으로써 기술유출을 예방할 수 있었다.

◆ 기술협력·공동연구
해외 유력기업과의 기술협력도 요주의 대상. 우월적 지위에 있는 기업이 일방적으로 국내기업에 기술정보를 요구한 뒤, 기술이전은 계속 미루는 것이 일반적인 수법.
또한 공동연구를 명분으로 기술자를 초청해 공동연구를 하게 한 다음 기술자가 외출하거나 자리를 비울 때 마다 자료를 복사해 정보를 빼내기도 한다.
이와는 반대로 기술연수 명목으로 보낸 직원을 스파이로 활용하는 예도 있다. 기술연수생으로 위장취업 시키거나 파견 직원을 통해 합작사의 첨단기술이 입력된 컴퓨터 비밀번호를 알아내 기밀을 빼내도록 하거나 물품 등을 반출토록 하기도 한다. 함께 생활을 하다보면 경계심이 늦춰지는 빈틈을 이용한 정보도둑질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