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비행 끝에 파리에 도착한 날, 나는 큰 충격을 받았어요. 길가에 늘어선 자동차, 수많은 건물들, 낮은 하늘 속에서 갑자기 답답함과 고독이 밀려들었죠. 그래서 무작정 걸었습니다. 어떤 도시를 알고 싶다면 길을 잃어버려봐야 합니다. 길을 찾으려고 세상을 찬찬히 살펴보게 되니까요. 낯선 골목을 헤매다가 갑자기 센강이 나타났어요. 강은 황량한 겨울 속에서 유일하게 숨 쉬는 존재 같았어요. 그때야 안도감을 느꼈어요. 그때 내 인생에도 새롭게 봄이 시작된 것이지요.”
- 건축가 정기용, 파라다이스 2008년 1월 인터뷰 중에서 -

대학시절에 요절한 친구의 장례식 내내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나는 내가 감정을 잃어버리고 살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당시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정신적 충격이었습니다. 충격이 가시면서 '나'라는 사람에 대해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니 나는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고 무척 오랫동안 노력해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궁금해졌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썼을까?’ 그때부터 나는 내 마음을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잘 알 수 없었습니다. 제대로 살펴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1991년도 일입니다.  

얼마 전 큰 아이가 축구공을 잃어버렸습니다. 놀다가 챙기지 않고 집에 왔더니 그 사이에 축구공이 없어진 것입니다. 남은 공이 하나 더 있었기에 아이는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얼마 되지 않아 또 잃어버렸습니다. 우리 부부는 한 동안 축구공 없이 지내게 하고 한 달여가 지나 새 공을 사주었습니다. 아이는 가장 먼저 축구공에 이름을 썼습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올 때는 물론 노는 동안에도 축구공이 어디 있는지 종종 살피게 되었습니다. 

우리 속담 중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미리미리 대비하지 못한 어리석음을 꾸짖는 속담입니다. 소를 잃기 전에 외양간을 고치라는 의미이지만 어디 말처럼 그렇게 미리 대비한다는 것이 쉽겠습니까? 놓치거나 잃어버리기 전에 그 대상의 중요성을 안다는 것이 어디 쉽겠습니까?

세상에는 오히려 소를 잃고 ‘왜 미리 외양간을 고치지 않았을까?’라는 자책에만 빠져 있느라 정작 외양간을 고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소를 잃고 나서 외양간을 고치는 것도 저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삶이란 반복되는 것이라서 고치지 않으면 거듭해서 잃게 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상실은 고통의 순간이지만 한편으로 성찰의 기회입니다. 길을 잃어봐야 세상을 자세히 보고, 나를 잃어봐야 나를 찾으려 들 것이며, 사람을 잃었을 때 우리는 관계를 살펴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림보다 더 큰 문제는 잃고도 왜 잃어버렸는지 살펴보지 않는 것이고,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